노동절 (근로자의 날)
전세계적으로 5월 1일은 국제 노동자의 날 혹은 근로자의 날로 법정 휴일입니다. 흔히 약칭으로 메이데이(May day) 라고 합니다.
반면, 미국은 5월이 아닌 9월에 쉬는데요. 요일제 공휴일로 9월 첫번째 월요일이 노동절 이고, 이는 미국증시 휴장일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한국의 근로자 날은 1993년까지는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립일인 3월 10일이였으나, 1994년 부터는 국제 기준에 맞춰서 5월 1일로 변경되어서 운영 중 입니다.
그럼, 노동절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하나씩 살펴보죠.
노동절 유래
노동절은 1889년 국제 노동자 연합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회의에서 5월 1일을 ‘국제 노동자의 날’ 로 선언하면서 자리를 잡은 날입니다.
5월 1일로 날짜가 정해진 이유는 1886년 5월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 희생자들을 기리고, 전 세계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권리를 요구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에 대해서는 이따가 좀 더 알아보도록 하고요. 정작 미국은 왜 이날이 아닌 9월로 근로자의 날을 정했는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미국은 왜 9월에 노동절(Labor Day)가 있나요?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지 않으며, 대신 9월 첫째 주 월요일을 노동절로 기념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다소 정치적인 맥락이 있는데요.
국제 노동절의 유래가 된 헤이마켓 사건이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는 연대와 투쟁의 상징이 되었죠.
반면, 미국내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요.
헤이마켓 사건이 무정부주의자와 급진적 사회주의자가 주도한 것으로 비춰지면서 ‘급진적 운동과 폭력’으로 연결되는 이미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의 정부와 자본가 계층은 노동 운동의 급진적 요소를 약화 시키고, 노동 운동을 더 온건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국제 노동절과 미국 노동절의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미국 정부는 노동자의 공헌을 기리는 날을 지정하되, 급진적 이념과 거리두기 위해 5월 1일이 아닌 별도의 날을 선택하게 된거죠.
미국 노동절 9월 첫째주 월요일
그렇게 선택된 날이 9월 첫째주 월요일입니다.
이는 최초의 미국내 노동절 퍼레이드로 알려진 뉴욕의 노동자 퍼레이드가 열린 1882년 9월 5일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최초의 노동절 퍼레이드는 휴일은 아니고 노동조합원들이 모여서 하는 일종의 거리 행사였습니다.
그러다 1887년 오리건주가 미국 최초로 노동절을 공휴일로 지정했고요.
1894년이 되어서야, 미국 연방정부가 9월 첫째 주 월요일을 공식적으로 노동절(Labor Day)로 선언하며, 국가 공휴일로 지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당시 풀먼 스트라이크(Pullman Strike)라는 대규모 노동 파업 이후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1894년 풀먼 파업(Pullman Strike) 과 노동절 지정
풀먼 파업은 시카고의 풀먼 철도 회사에서 발생한 대규모 파업으로,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철도 운송이 마비되었고, 노동자들과 정부 간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입니다.
미국 노동운동 역사에서 가장 폭력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어요.
당시, 계속된 경제 불황으로 인해 풀먼 회사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하였는데, 생활고에 시달린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게 되면서 문제가 시작되게 됩니다.
유진 V. 뎁스(Eugene V. Debs)가 이끄는 전미철도노동조합(ARU)이 풀먼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전국적인 철도 교통 파업으로 이어집니다.
철도 운송 마비로 경제가 타격을 입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는 연방군을 시카고로 파견했습니다.
파업은 심각한 폭력 사태로 이어져 군대와 경찰이 시위 진압 과정에서 과도한 무력을 사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최소 30명 이상의 노동자 사망, 57명의 부상자, 3,000 여명이 체포되었다고 해요.
폭력적인 진압과 대규모 사상자 발생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고, 노동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클리블랜드 행정부는 분노한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9월 첫째 주 월요일을 연방 공휴일로 지정하여 노동절로 기념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은 급진적 운동과 연관된 5월 1일 대신 온건하고 화합적인 9월의 날을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채택함으로써,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정치적인 이유가 그 배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노동 운동 배경
노동 운동은 근본적으로 피고용인과 고용주 사이의 불평등에서 발생합니다.
산업혁명으로 모든게 빠르게 변화되고 고성장에만 집중하다 보니 자연히 노동자들의 안전한 작업 환경이나 임금 수준 보다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집중하게 되면서, 이 불평등이 시작됩니다.
이에 1820년, 미국의 초기 노동 조합은 노동자들의 근로시간 단축, 임금인상, 노동 환경 개선을 목적으로 소규모로 설립이 되는데요.
동맹 파업에 들어간 첫번째 노동자 단체는 인쇄업자였습니다. 그 다음은 고급 가구 제작자들이였고, 이후는 목수들도 참여하면서, 점점 온갖 종류의 노동조합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아동 노동자들은 착취가 심각한 수준으로 이 시기 미국 전역에서 약 200만 명의 어린이가 노동에 종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인과 비슷하게 하루 10~12시간 노동이 일반적이였고, 공장의 작업 환경은 매우 위험하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성인 노동자보다 훨씬 낮은 20-30%의 임금을 받는 형편이였죠.
- 근로시간 단축(10시간 근무 요구)
- 임금 인상
- 노동 환경 개선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기 계발
사실, 미국에서 8시간 근무가 법제화 된 것은 헤이데이 사건이 발생하기 18년 전인 1868년입니다.
1868년, 공공근로자 8시간 근무제 법 (The National Eight Hour Law) 에 따라 미국 연방정부에서 고용한 공공부문 노동자(주로 건설 및 제조업 노동자)는 하루 8시간을 표준 근무 시간으로 규정 되었습니다.
또한 8시간 이상 근무 시 추가 근로에 대한 별도의 임금이 지급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었고, 민간 부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노동 조합은 민간 부문에도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과 최소 임금을 얻기 위하여 기꺼이 싸우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사하기도 했는데요.
비록 처음 있었던 소규모 조합들의 시도는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지만, 노동 조합에 참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가 점차 늘어나자, 노동자 연합은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벌이게 됩니다.
이 당시의 슬로건이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자기 계발’ 이였습니다.
물론, 기업과 정부 지도자들은 이것을 좋아 했을리가 없겠죠.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닿으면서 발생한 사건이 헤이마켓 사건입니다.
헤이마켓 사건 (Heymarket Affair)
5월 1일: ‘8시간 노동’ 을 위한 전국적인 파업
1886년 5월 1일, 대규모의 노동자가 미국 전역에서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는 시위와 파업에 동참했습니다.
이날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 30만에서 최대 50만이 동참 한것으로 알려져 있고요.
당시 미국 노동운동은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아나키스트들 역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5월 3일: McCormick Reaper 공장 사건
그런데, 시카고의 McCormick Reaper 공장에서 파업 노동자와 사측이 무력 충돌을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에 경찰이 개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했고, 4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5월 4일: 헤이마켓 집회
다음날인 5월 4일,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의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엽니다.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경찰이 집회를 해산하려 시도했습니다. 이때 누군가(정체 불명)가 경찰 쪽으로 폭탄을 투척 했습니다.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고, 노동자 측에 사망자 8명, 부상자 70명의 사상이 발생합니다.
경찰측은 폭파범의 확실한 정체를 밝히지 못했지만, 노동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되었습니다.
헤아마켓 사건의 진범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재판부의 사형 선고가 부당한 졸속 재판이였다는 것에 학계의 주류설 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사실 그들 대부분은 폭탄이 던져진 때에 그 집회에 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충분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부는 그 중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판결은 해당 노동 운동가들이 참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이 나온 판결로, 이후 세계적으로 많은 노동 운동가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오심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미국 노동 관련 법
미국인 뿐만 아니라, 현재 대다수의 근로자가 누리고 있는 혜택들은 노동자들의 생명이라는 큰 희생의 대가로 이루어 진 것들입니다.
미국에서는 이후 노동자들의 권익을 증진 시키는 여론이 커지면서 당시 노동 조합이 요구했던 사항들이 하나씩 법제화가 되었습니다.
1914년, 클레이튼 반독점법(Clayton Antitrust Act)
노동 조합 활동이 반독점법에 따라 처벌받지 않도록 보호했습니다.
1916년, 애덤슨 법(Adamson Act)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부문에 8시간 노동제가 적용되게 된 법입니다.
이 법은 철도 노동자들에게 8시간 근무제를 도입했으며, 이후 다른 산업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38년, 공정 노동 기준법(Fair Labor Standards Act, FLSA)
미국에서의 아동 노동이 공정 노동 기준법을 통해 본격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또한 이 법은, 민간 부문 전반에 걸쳐 8시간 근무제와 초과 근무수당 지급을 명문화 하면서, 현대적인 근로시간 규제의 기틀이 마련된 법안 입니다.
주 40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초과 근무 시 추가 수당(시간당 1.5배 임금) 지급 의무화 하고, 아동 노동 금지, 최저임금 설정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마무리
정리해보니, 목숨까지 걸고 싸웠던 일들이지만 실제 법제화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요.
헤이데이 마켓 사건이 발생한 것이 1886년이고, 그 후 8년이 지나서야 1894년에 ‘노동절(근로자의 날)’이 연방 공휴일로 제정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다시 16년이 지나야 애덤슨 법으로 민간 부문에도 ‘8시간 노동제’가 적용되게 되니, 처음 ‘헤이데이 마켓’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비교하면, 무려 24년이 지나서야 민간 부문의 ‘8시간 근무제’ 도입이 성사되었네요.
‘아동 노동 금지’가 법제화 된건 1938년이니, 50년이 더 넘게 걸렸고요.
지금 우리가 ‘당연한 권리’ 로 누리는 혜택 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에 또 다른 컨텐츠로 뵐게요.
댓글